안녕하세요! 별집 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전명희입니다. 제가 작년 8월부터 한겨레 ESC에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어요. 칼럼을 통해 3주에 한번 집에 대한 상식을 깨는 물음을 던져보려 합니다. 제 글이 '나를 위한 집'을 찾으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꽃을 다루는 일을 하는 건축주에게 올해 초 튤립 구근 두개를 선물받았다. 재미있게도 어떤 색의 튤립인지는 꽃을 피워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45일쯤 지나자 부모님 댁에 둔 튤립 구근이 가장 먼저 꽃을 피웠다. 분홍빛이 도는 보라색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돌출창에 둔 튤립 구근은 도통 꽃을 피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매불망 한달여를 더 기다린 끝에 (엊그제야) 튤립의 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기만성형의 나의 첫 튤립. 봄의 전령사답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려고 주인의 애간장을 녹이면서까지 적절한 개화 시기를 기다렸던 걸까. 지금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청초한 순백의 튤립 향에 취해 이 원고를 쓰고 있다.
실패 없이 튤립 구근 꽃피우기에 성공해 한껏 우쭐해 있는 나는 사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식물 저승사자’라 여겼다. 멀쩡하던 식물도 나와 있으면 이내 기력을 잃고 죽어갔다. 비교적 키우기 쉬운 식물로 알려진 금전수, 선인장과도 모두 작별을 고했다. 어느새 나는 내 공간에 생명을 들이는 일에 매우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회연결망서비스(SNS)에 올라온 플랜테리어(플랜트+인테리어) 사진으로 대리만족을 느낄 뿐, 내 방 안에 진짜 식물을 둘 엄두를 차마 내지 못했다.
지난해 여름 이런 나에게 지인이 장기간 집을 비워야 한다며 자신의 반려식물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다행히 지인의 식물은 스킨답서스, 안스리움(앤슈리엄), 디스키디아와 같은 초심자들이 많이 키우는 공기 정화용 식물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죽이면 안 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그간 내 곁을 떠나간 식물들의 증상을 검색해봤다. 황당하게도 과습이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나의 과도한 관심이 화를 부른 것. 그래서 이번에는 ‘츤데레’(겉으로 쌀쌀맞아 보이지만 속이 깊고 잘 챙겨주는 사람)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음은 온통 식물에 가 있었지만 너무 알은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백화점에 갔을 때 점원이 나를 모르는 척해주길 바랐던 것처럼 식물도 나에게 그럴 거라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했다. 다행히도 두 계절이 지난 지금 식물들 모두 쑥쑥 잘 크고 있다. 식물 키우는 일에 자신감이 붙어 감히 식집사(식물+집사) 친구들에게 몇차례 식물 분양도 받았다.
예전에는 식물 키우기를 누군가의 단순한 취미 생활쯤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일이 됐다. 집에 식물을 들인 뒤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여러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우선 소품으로 채워졌을 때보다 공간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고 풍성해진 느낌이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식물을 이리저리 배치하다 보면 공간을 꾸미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나에게는 아직 요원한 일이지만 식물이 많아지면 비슷한 형태의 식물을 나란히 늘어놓거나, 다른 형태와 높이를 가진 식물을 한데 그러모으는 식으로 리듬감이 느껴지는 배치를 즐길 수도 있겠다.
반려식물로 인해 얻은 또 다른 긍정적인 측면은 작은 변화에도 기꺼이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거다. 조금 더 짙어진 잎사귀, 새로 피어난 꽃봉오리, 살짝 키가 자란 줄기와 같이 오늘 발견한 작은 변화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식물을 키우면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다. 여기에 섬세해진 관찰력은 덤이다. ‘식물 금손’인 엄마와 오빠가 식물을 보며 주고받던 대화들이 이해가 가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내가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발견한 작은 즐거움에 대해 재잘거린다.
반려식물은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 외출했다 빈집에 홀로 돌아왔을 때 식물이 만들어낸 안락한 공기가 집 안에 교감할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애정을 쏟을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확실히 외로움을 잘 타는 나에게 식물은 마음에 큰 위안을 준다. 나만의 모닝 루틴에 따라 식물을 잘 키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칭찬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고, 덕분에 몸과 마음이 날로 건강해지고 있다.
물론 집에 반려식물이 있으면 불편한 점도 생긴다. 바로 며칠 출장이나 여행을 다녀와야 할 때 물을 넉넉히 주고 간다 해도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또 식물이 많아질수록 관리에 드는 시간이 늘어나 회사 일로 바쁠 때는 물을 주는 일마저도 작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내가 느낀 긍정적인 변화에는 공감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관리할 엄두가 나지 않거나, 식물을 죽일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여전히 앞선다면, 창밖으로 멋진 자연 풍경을 가진 집을 찾아보길 바란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유일주택의 경우 3층에 있는 세대 창문에서 이웃집의 옥상정원이 바라다보이는데, 가을이면 감나무에 주홍빛을 머금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정겨운 모습이 포착된다. 도심 속 건물이라는 의외의 장소에서 감이 익어가는 전 과정을 지켜보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만약 ‘차경’(자연의 경치를 빌림)이 가능한 집을 찾는 게 어렵다면, 대안으로 복도와 같은 공용 공간에 조경이 잘되어 있는 집을 찾아보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창밖 풍경을 감상만 하기보다는 식물이 생장하면서 보여주는 변화들을 함께 기록해보자. 내가 직접 돌보는 식물이 아닐지라도 관찰하고 기록하는 과정 속에서 교감의 즐거움과 설렘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겨울잠에 들었던 봄이 슬슬 깨어나려나 보다. 봄비가 내린 뒤로 동네 여기저기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원래 봄은 눈도 마음도 호강하는 반가운 계절이어야 하건만 열흘간 계속된 산불 피해로 마음 한쪽이 여전히 무겁다. 이번 봄엔 산불 피해 지역에 가서 나무를 많이 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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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전명희
출처 한겨레
발행일 2022.03.17
안녕하세요! 별집 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전명희입니다. 제가 작년 8월부터 한겨레 ESC에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어요. 칼럼을 통해 3주에 한번 집에 대한 상식을 깨는 물음을 던져보려 합니다. 제 글이 '나를 위한 집'을 찾으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꽃을 다루는 일을 하는 건축주에게 올해 초 튤립 구근 두개를 선물받았다. 재미있게도 어떤 색의 튤립인지는 꽃을 피워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45일쯤 지나자 부모님 댁에 둔 튤립 구근이 가장 먼저 꽃을 피웠다. 분홍빛이 도는 보라색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돌출창에 둔 튤립 구근은 도통 꽃을 피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매불망 한달여를 더 기다린 끝에 (엊그제야) 튤립의 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기만성형의 나의 첫 튤립. 봄의 전령사답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려고 주인의 애간장을 녹이면서까지 적절한 개화 시기를 기다렸던 걸까. 지금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청초한 순백의 튤립 향에 취해 이 원고를 쓰고 있다.
실패 없이 튤립 구근 꽃피우기에 성공해 한껏 우쭐해 있는 나는 사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식물 저승사자’라 여겼다. 멀쩡하던 식물도 나와 있으면 이내 기력을 잃고 죽어갔다. 비교적 키우기 쉬운 식물로 알려진 금전수, 선인장과도 모두 작별을 고했다. 어느새 나는 내 공간에 생명을 들이는 일에 매우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회연결망서비스(SNS)에 올라온 플랜테리어(플랜트+인테리어) 사진으로 대리만족을 느낄 뿐, 내 방 안에 진짜 식물을 둘 엄두를 차마 내지 못했다.
지난해 여름 이런 나에게 지인이 장기간 집을 비워야 한다며 자신의 반려식물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다행히 지인의 식물은 스킨답서스, 안스리움(앤슈리엄), 디스키디아와 같은 초심자들이 많이 키우는 공기 정화용 식물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죽이면 안 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그간 내 곁을 떠나간 식물들의 증상을 검색해봤다. 황당하게도 과습이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나의 과도한 관심이 화를 부른 것. 그래서 이번에는 ‘츤데레’(겉으로 쌀쌀맞아 보이지만 속이 깊고 잘 챙겨주는 사람)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음은 온통 식물에 가 있었지만 너무 알은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백화점에 갔을 때 점원이 나를 모르는 척해주길 바랐던 것처럼 식물도 나에게 그럴 거라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했다. 다행히도 두 계절이 지난 지금 식물들 모두 쑥쑥 잘 크고 있다. 식물 키우는 일에 자신감이 붙어 감히 식집사(식물+집사) 친구들에게 몇차례 식물 분양도 받았다.
예전에는 식물 키우기를 누군가의 단순한 취미 생활쯤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일이 됐다. 집에 식물을 들인 뒤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여러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우선 소품으로 채워졌을 때보다 공간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고 풍성해진 느낌이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식물을 이리저리 배치하다 보면 공간을 꾸미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나에게는 아직 요원한 일이지만 식물이 많아지면 비슷한 형태의 식물을 나란히 늘어놓거나, 다른 형태와 높이를 가진 식물을 한데 그러모으는 식으로 리듬감이 느껴지는 배치를 즐길 수도 있겠다.
반려식물로 인해 얻은 또 다른 긍정적인 측면은 작은 변화에도 기꺼이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거다. 조금 더 짙어진 잎사귀, 새로 피어난 꽃봉오리, 살짝 키가 자란 줄기와 같이 오늘 발견한 작은 변화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식물을 키우면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다. 여기에 섬세해진 관찰력은 덤이다. ‘식물 금손’인 엄마와 오빠가 식물을 보며 주고받던 대화들이 이해가 가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내가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발견한 작은 즐거움에 대해 재잘거린다.
반려식물은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 외출했다 빈집에 홀로 돌아왔을 때 식물이 만들어낸 안락한 공기가 집 안에 교감할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애정을 쏟을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확실히 외로움을 잘 타는 나에게 식물은 마음에 큰 위안을 준다. 나만의 모닝 루틴에 따라 식물을 잘 키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칭찬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고, 덕분에 몸과 마음이 날로 건강해지고 있다.
물론 집에 반려식물이 있으면 불편한 점도 생긴다. 바로 며칠 출장이나 여행을 다녀와야 할 때 물을 넉넉히 주고 간다 해도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또 식물이 많아질수록 관리에 드는 시간이 늘어나 회사 일로 바쁠 때는 물을 주는 일마저도 작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내가 느낀 긍정적인 변화에는 공감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관리할 엄두가 나지 않거나, 식물을 죽일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여전히 앞선다면, 창밖으로 멋진 자연 풍경을 가진 집을 찾아보길 바란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유일주택의 경우 3층에 있는 세대 창문에서 이웃집의 옥상정원이 바라다보이는데, 가을이면 감나무에 주홍빛을 머금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정겨운 모습이 포착된다. 도심 속 건물이라는 의외의 장소에서 감이 익어가는 전 과정을 지켜보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만약 ‘차경’(자연의 경치를 빌림)이 가능한 집을 찾는 게 어렵다면, 대안으로 복도와 같은 공용 공간에 조경이 잘되어 있는 집을 찾아보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창밖 풍경을 감상만 하기보다는 식물이 생장하면서 보여주는 변화들을 함께 기록해보자. 내가 직접 돌보는 식물이 아닐지라도 관찰하고 기록하는 과정 속에서 교감의 즐거움과 설렘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겨울잠에 들었던 봄이 슬슬 깨어나려나 보다. 봄비가 내린 뒤로 동네 여기저기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원래 봄은 눈도 마음도 호강하는 반가운 계절이어야 하건만 열흘간 계속된 산불 피해로 마음 한쪽이 여전히 무겁다. 이번 봄엔 산불 피해 지역에 가서 나무를 많이 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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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전명희
출처 한겨레
발행일 2022.03.17